혼.잣.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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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시티> 6년간의 질문과 해답
“7시30분에 일어나 아침밥을 먹고, 지난 연애는 가능하면 빨리 지워버리는 도시. 더이상 이곳에는 <티파니에서 아침을>도 <어페어 투 리멤버>도 없다.”
“뉴욕 30대 남자 중에 우리가 사귈만한 남자들은 더 이상 없어. 줄리아니(전 뉴욕시장)가 홈리스들을 처리할 때 다 같이 쓸어버렸다니까” |
<섹스&시티>는 <프렌즈>도 <밴드 오브 브라더스> <베이워치>도 아니었다. <프렌즈>처럼 남자친구와 공감하며 함께 웃을 수 없었고, <밴드 오브 브라더스>처럼 테스토스테론을 녹여 무기를 만들지도 않았다. 다양한 가슴크기를 가진 비키니 아가씨들 대신 인종도, 국적도, 직업도, 크기도, 체위도 다양한 남자들이 에피소드마다 바뀌어가며 등장했다. 그렇게 이 에스트로겐으로 가득 찬 맹랑한 시리즈는 오로지 여자의, 여자에 의한, 여자를 위한 은밀한 사랑방이었다. 물론 <섹스&시티>는 제목답게 ‘섹스’에 대한 온갖 가지 이야기를 까발렸고, “지구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 뉴욕에 대한 연가(戀歌)를 쉬지 않고 불러댔다. 하지만 초창기 머리색도 성격도 취향도 다른 4종류의 싱글여성들을 전시하는 팬시한 기획상품처럼 보여졌던 <섹스&시티>는, 노골적인 성적 대화들과 발랄한 조크, 파격적인 패션으로 포장되었던 이 캐주얼한 드라마는, 마지막 6시즌에 이르러서야 자신의 정체가 꽤나 진지한 휴먼스토리임을 드러낸다. 사랑에 대한, 관계에 대한, 인생에 대한 ‘진짜’ 질문을 던지는 <섹스&시티>의 6년을 돌아보며 이 걸출한 시리즈가 남긴 것을, 총 94편의 에피소드들에서 추출한 ‘싱글생활 6계명’과 함께 담아낸다.
“여자가 남자를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바로 침대 위야. 만약 우리가 남자들에게 영구히 오럴 섹스를 할 수 있다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 꺼야.” _사만다 “들어봐, 심지어 나는 남자친구의 도어맨에게서 이별통고를 받은 적도 있었다니까. ‘미안해요, 홉스양. 조나단씨는 다시는 당신을 만나러 안올꺼예요” _미란다 “누가 저 작은 섬(맨하탄)이 우리의 그 많은 남자친구들을 다 수용 할 만큼 큰 곳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니?” _미란다 “남자한테 ‘난 니가 싫어’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섹스를 즐길 수 있지만, ‘난 널 사랑해’라고 말하면 아마 넌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을 꺼야.” _사만다 |
“자위할 때 어떤 남자를 상상해?” “(입모아) 러셀 크로!” “아, 러셀 크로 전엔 도대체 누굴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던거야?” “(다시한번 입을 모아) 조지 클루니!!” |
그러나 지난 2000년 유료케이블시대의 도래와 이 땅에 상륙한 <섹스&시티>는 속닥거리는 입소문을 타고 그 세를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커피숍에 모여 캐리의 새로운 남자 이야기나 사만다의 엽기적인 애정행각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룹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녀들이 입고 나온 옷과 들고 나온 가방, 신고 나온 구두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일본 패션으로 도배되었던 여성잡지들은 앞다투어 뉴욕스타일에 안테나를 세웠고, 심지어 이 시리즈의 이름을 딴 과자도 등장했다. 이런 와중에 <싱글즈 인 서울>처럼 작위적인 설정만을 가져온, 영혼없는 프로그램이 탄생하는 비극과 함께, <결혼하고 싶은 여자>처럼 <섹스&시티>에 상당 부분 젖줄을 대고 있는 국산드라마가 기획되기도 했다.
<섹스&시티>는 여성들을 위한 ‘성교육 지침서 Vol.2’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몇십년간 착각과 몰이해 속에 살아왔던 남성들에게 여자들의 욕망과 본질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지점보다 정확하게 5cm 아래 있음”을 알려주는 재교육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스스로를 “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명의 말로 즐겨썼던 남자들에게 여자들 역시 “섹스하고 싶어 미쳐버리는 순간”이 솔찮게 찾아오는 똑같은 동물임을, 대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음담패설로 저하시키는 대신 위트있는 유머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지적인 동물’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 사는 남자하고 데이트를 할 방법은 전혀 없단 말이지? ” “음… 윌리엄 왕자 정도?” |
그렇게 지난 6년간 셀 수 없는 많은 남자들이 이 네 여자의 침실을 오갔고, 그 안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해답, 끊이지 않는 유머가 탄생되었다. 1, 2시즌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다큐멘터리성 인터뷰 장면들이나,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거는 독백은 시즌을 더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어느덧 주변의 누군가는 샬롯이었고, 미란다였고, 아주 소수는 사만다였으며, 자신은 캐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청자들과 캐릭터간의 동일화가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너희도 그렇지 않니’하며 동의를 구하던 카메라의 눈은 각각의 캐릭터 내로 충실하게 잠입해 들어갔고 3시즌 이후부터는 보편적인 질문보다는 더 깊고 구체적인 질문들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구찌도, 오럴섹스도, 보그도 안녕
물론 6년 동안 변함없는 것은 단 한컷도 그냥 흘릴 것 없는 깔끔하고 경제적인 연출과 뛰어난 구성이다. 30분도 채 안 되는 한편의 에피소드가 소화해내는 내용은 정교한 생략 속에 매우 빠른 진행을 보인다(한 에피소드 안에서 어떤 커플은 만나고, 결혼식까지 연다!). 때론 타악기의 신명나는 리듬 속에, 때론 현악기의 서정적인 멜로디 속에 질감도 박자도 다른 이야기들이 자유자재로 교차된다. 특히 거의 매 회 등장하는 바, 레스토랑신에서 4명의 여자사이를 날아다니는 컷 편집의 속도감은 아찔할 정도다. 물론 이미 수다가 가지는 빠른 스피드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속도는 쉽게 인식되지 못한다.
“난 빅을 길들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날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세상엔 길들일 수 없는 여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롭게 달릴 것이다. 자신들과 미친 듯이 달려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
글 백은하/ 자유기고가 lucilife@naver.com
캐리, 사만다, 미란다, 샬롯이 온몸으로 써내려 간 싱글생활 6계명
“사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건 실수들이 아닐까?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사랑에 빠진다거나 아기를 갖거나 현재의 우리로 있지 못할 테니까.” _캐리
그녀들은 똑같은 옷은 두번 다시 입지 않지만, 똑같은 실수는 열번이고 되풀이한다. 캐리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던 미스터 빅의 키스를 매번 받아들이고, 미란다는 고환암으로 더이상 ‘쌍방울’일 수 없는 스티브에게 ‘자비의 섹스’(merci fuck)를 선사한 끝에 임신한다. 결혼의 쓴맛을 이미 맛본 샬롯도 두 번째 불구덩이 속으로 자신을 던져넣는다. 그렇게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조건반사의 희생물들”이자 ‘파블로프의 개’들이다. 하지만 삶은 실수라는 벽돌로 지어진 구조물이다. 그들은 실수를 통해 성숙해가고, 드라마는 실수를 통해 진행되며, 시청자들은 그들의 실수를 통해 안도감을 얻는다. 하바드를 졸업한 변호사도, 잘 나가는 칼럼니스트도, 똑똑한 큐레이터도 실수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Coulda woulda shoulda!
“관계가 끝나면 유령도 떨쳐낼 수 있을까? 아님 과거라는 망령에 영영 홀려 있어야 할까?” _캐리
과연 94개의 에피소드 동안 캐리를, 미란다를, 샬롯, 사만다를(!)을 거쳐간 남자가 몇명이나 될까? 이들이 길을 가다 옛 남자친구와, 게다가 “구질구질한 최악의 모습으로 만날 확률”은 어니언링을 먹다가 프렌치 프라이 조각을 발견하는 것만큼 높다. 그러나 대부분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그를 발견하고 다른 골목으로 피해가거나, 황급히 방향을 틀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섹스& 시티>는 과거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유령과 정면 충돌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캐리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에이단과 맞닥뜨리고 난 이후에야 그에 대한 오랜 체증에서 벗어나게 되고, 22살에 나눈 원나잇스탠드의 결과로 낙태수술을 받은 트라우마는 결국 그 웨이터가 자신의 존재조차 기억 못함을 확인하고 나서야 치유된다. 그렇게 캐리는 그때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닫고, “13살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아기”와 제대로 이별한다. 심지어 6시즌에는 “부모님이 무서워서 키스까지만 진도를 나간” 고등학교 첫사랑(데이비드 듀코브니)까지 등장해 핑크빛으로 덮어두었던 ‘EX-FILE’(전 애인 파일)을 첫장부터 잔인하게 재기술한다.
“리차드,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난 나를 더 사랑해요.” _사만다
<섹스&시티>는 결코 독립적인 여성이 되는 법이 남자와의 사랑을 끊고 초콜릿 케이크나 바이브레이터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권하진 않는다. 대신 ‘두 영혼, 하나의 생각’이라고 적혀 있는 약혼식 초대장을 보고 “사람은 둘인인데 생각이 하나라면 문제가 있는 거야”라고 반박한다. 리차드가 바람을 피울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몇십층을 뛰어올라온 사만다는 이렇게 의심 가득한 관계를 더는 지속시킬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를 사랑하지만,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목걸이를 잃어버렸다 찾은 캐리 역시 더이상 자신이 파리에 머무를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녀의 귀향은 파리에 왕자님처럼 찾아온 빅의 깜짝 등장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빅은 또다시 심장을 닫고 이기적으로 돌아설지도 모를 일이다. 캐리도, 우리도 더이상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도시 연애의 신화’ 따위에 속아넘어갈 만큼 순진하진 않다. 하지만 캐리는 그 선택에 대해 어떤 원망도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목에 다시 걸려진, 목걸이에 쓰여진 여섯 글자는 ‘Mr. Big’이 아니라 ‘Carrie’였기 때문에.
“왜 우리는 결혼을 해야 하지? 혼자 죽기 싫어서 같은 이유 말고.” _미란다
“레즈비언이 될지언정” 커플이 되어야만 주류로 편입될 수 있는 보수적인 사회. 하지만 이 4명의 여자들은 누구도 떨어지는 부케를 잡으려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진 않았다. 또한 유부녀, 유부남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적도 없다. 그저 ‘노아의 방주’의 일원이 되지 못한 자신을 ‘하자있는 인간’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고 말할 뿐이다. 4시즌 말 ‘미스터 퍼펙트’(혹은 Mr. too perfect)인 에이단에게 또다시 이별의 아픔을 안겨준 캐리의 선택은 쉽게 용납하기 힘든 것이었다. 100만원도 안 되는 은행잔고에, 대출도 어려운 36살 싱글에겐 참 간도 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결코 ‘좋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The one)이란 법은 없는 것이다. 반대로 미란다는 모든 면에서 “전혀 수준이 맞지 않는” 스티브를 사랑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그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완벽한 남자, 완벽한 결혼, 완벽한 가정”을 꿈꾸었던 샬롯은 대머리에, 유대인에, ‘털북숭이 해리’(hairy harry)와 결혼한다. 6시즌의 마지막, 네 친구들 중 둘은 결혼을 했고, 둘은 싱글로 남았다. 이후 모두 결혼을 하게 될지, 모두 다시 혼자가 될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결혼은 시작도 끝도 아니다. 그저 과정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천생연분일지 몰라, 멋진 남자들은 재미로 만나는 거고, 우리가 서로의 천생연분이 아닐까?” _샬롯
싱글 뉴요커. 그들에게 친구는, 어머니이자, 언니이자, 동생이다. 우리는 안다. 35살의 노처녀의 손을 잡고 장례식에서 함께 행진해줄 사람도, 미혼모가 되는 순간에 기꺼이 이모가 되겠다고 나서줄 사람도, 방금 손톱정리 받은 손으로 루프를 꺼내줄 사람도, 혼자 죽은 채 고양이에게 얼굴 반쪽을 뜯길는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 전화를 받아줄, 어깨를 내줄, 등을 두드려줄 사람도, 친구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피로 맺어진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만들어낸 가족”인 친구들은 고통스러운 순간에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고, 세상에서 가장 독한 조크로 그 아픔을 얼얼하게 만든다. 로맨틱한 밤을 놓치거나 말거나, 큰 맘 먹고 장만한 크리스찬 루부탱 구두에 양수가 쏟아져 망가지거나 말거나, 그들은 남편이 아니라 친구의 손을 잡고 아기를 낳는다.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안 나. 내가 누군가를 정말 좋아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지. 난 단지… 그때 기분만이 생각나.” _캐리
자신의 칼럼을 책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은 캐리는 “당신은 사랑에 대해 긍정적인가요? 부정적인가요?” 라는 질문을 받는다. 캐리는 잠시 망설인다. “과연, 나는 사랑을 믿는가.” 연애의 낭만이 현실로 변하는 순간을 경험하고, 결국 진절머리나는 아픈 사랑의 기억을 얻고나면 심장은 스스로 방어기제를 만들게 마련이다. 사랑을 부정함으로써 실연을 극복한다. 하지만 캐리도, 샬롯도, 미란다도 계속 잃을 걸 알면서도 “사랑이란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이 징그러운 사랑은 “침대의 네 귀퉁이를 하도 많이 문질러서 이제는 완전히 이쑤시개가 되어버린”, 섹스에서는 남자처럼 진화해버린 사만다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저 하룻밤 상태처럼 보였던 스미스로부터 사만다는 난생처음 믿음과 위로를 경험한다. 이 젊고 믿음직한 청년은 유방암으로 머리가 빠지는 사만다 앞에서 자신의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시키고, 그동안 누구도 점령하지 못했던 사만다의 ‘손의 처녀성’을 차지한다. 4명의 주인공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을 찾는 이 시리즈의 결론이 나이브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다면 캐리가 산처럼 쌓인 마놀로 블라닉 구두에 둘러싸인 호호할머니가 되어, 마지막 숨을 거두어야 전복적이었을까?
1시즌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캐리는 떠나가는 빅에게 묻는다. “당신, 진짜 사랑을 해본 적이 있어요?” 시 대신 이메일을 쓰고, 저지방 아이스크림을 먹고, 기름기가 제거된 시대에 사랑을 나누는 도시의 남녀에게 사랑은 정말 있는 걸까? 지난 6년 동안 이 질문에 대한 <섹스&시티>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좆나 당연하고 말고!”(abso- fucking-lutely!). <섹스& 시티>는 “사랑해”라는 고백이 터부시되어버린 시대에, 격렬한 몸동작과 독한 언어로 사랑의 존재를 증명시켜준, 가장 강력한 부정을 통해 가장 강력한 긍정을 이끌어낸 드라마다.
백은하/ 자유기고가 lucilife@naver.com